순교성인 26위

26 Martyr Saints

성인유해 참배실에 모신 스물여섯 분의 성인

유해 부위와 생애를 소개합니다

상세 위치는 참배실 현장 표기를 참조해 주세요

신앙을 증거한 스물여섯 분의
순교 성인을 현양합니다.

  • 김대건은 1821년 충청도 솔뫼에서 천주교 신자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보고 1836년 나 베드로(모방) 신부는 그를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그는 6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고 1845년 8월 페레올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아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서울과 용인 지방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1846년 음력 4월 주교의 명에 따라,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황해도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김 신부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서울 좌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취조 중, 김 신부의 넓은 식견과 당당한 태도에 대관들은 그를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고 생각하였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의 처형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과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 남종삼은 충청도 충주(忠州)에서 태어나 남상교(南尙敎)의 양자가 되었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군수가 된 남종삼은 항상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淸白吏)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관직에 따르는 미신행위로 인해 한때 교회를 떠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63년 대원군의 명으로 정3품 승지(承旨)가 되어 왕족 자제의 교육을 맡았다. 그러던 중 1866년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조정에서 문제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남종삼은 홍봉주(洪鳳周), 이유일(李惟一)등과 논의 하여 영불(英佛)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자는 소위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대원군과 장 (베르뇌) 주교와의 면담이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척신들의 압력, 장 주교와의 연락 지연,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 소문 등으로 실패했을 뿐더러 태도가 돌변한 대원군에 의해 병인 대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1866년 2월 고향인 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남종삼은 중도에서 자신의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고양군 축베더리로 피신했으나 2월 25일 주교의 하인 이선이(李先伊)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국청에서 6차의 국문(鞠問)을 받고 3월 7일 5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홍봉주와 함께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 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며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이었던 안 안토니오 주교는 한한불(韓漢佛)사전을 비롯하여 많은 번역서와 저서를 남겼고, 10여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완성하는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프랑스의 상류층 가정에서 자라나 한국 풍속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데다 위장병과 신경통에 시달렸지만, 한국말을 잘하고 보신탕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인 사제로 알려져 있다. 1845년 10월 조선에 들어와 20여 년 동안 양 떼를 위하여 봉사하던 안 주교는 1866년 3월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민 신부, 황석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더 심한 형벌을 받았다. 3월 30일에 안 주교 일행을 충청도 갈매못으로 압송한 형리들은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하였지만, 마침 이 날이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었으므로 안 주교가 당일 집행을 요구하여 그대로 형이 집행되었다.

  •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태어난 허계임은 시누이 이매임(李梅任)을 통하여 천주교를 알게 되어 이정희(李貞喜)와 영희(英喜) 두 딸과 함께 입교하였다. 1839년 3월, 남명혁(南明赫)과 이광헌(李光獻)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시누이와 두 딸 그리고 김성임(金成任), 김 루치아 등과 순교를 결심하고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지키던 포졸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자수하였다. 허계임은 포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여러 차례의 형문을 당하였으나 다 이겨 내고, 9월 26일 67세의 나이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 최경환은 충청도 홍주(洪州) 지방 다랫골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한국 교회의 창설 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고, 성장해서는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는 곳을 찾아 다니다가 가족들을 설득하여 서울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나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城), 경기도 부천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건설하였다. 1836년 아들 최양업(崔良業)을 나(모방) 신부에게 보내어 마카오에서 신학 공부를 하게 했다. 1839년 초에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동리 교우와 가족 등 4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수리산에서 서울의 포청까지 끌려간 최경환은 2개월 동안 하루 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하여 태장 340대, 곤장 110대를 맞았다. 9월 11일 최후로 곤장 25대를 맞고는 그 이튿날 옥사, 3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민 신부는 프랑스 랑그르 교구 출신으로, 1861년 사제가 되었고 1865년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충청도 내포에 머물며 안 주교에게 한국말을 배운 뒤 홍주(洪州)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갖은 고문을 겪은 뒤 3월 30일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음으로써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 ‘볼리외’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서 루도비코 신부의 한국명은 서몰례(徐沒禮)이다. 서 신부는 1840년 프랑스 보르도 교구에서 태어나 1864년에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에 백, 김, 민 신부와 함께 충청도 내포 지역으로 들어왔다. 그는 고해성사를 줄 만큼 한국말을 배운 뒤 공주 지방의 전교를 맡았지만, 임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겨를도 없이 박해를 맞았다. 서 신부는 장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광주 근처의 교우(서태순 아우구스티노)집에 숨어 있었지만 1866년 2월 27일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을 잘 참아 내었고 여러 질문에도 한국말이 서투르다는 핑계를 대며 대답을 회피하였다. 마침내 그 해 3월 7일에 동료 신부들과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되니 그의 나이 26세였다.

  • ‘베르뇌’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장 시므온 주교는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이며 한국명은 장경일(張敬一)이다. 프랑스의 르망 교구 출신인 장 주교는 1837년에 사제가 되었고 동양의 선교 지역인 베트남으로 건너갔다가 2년 동안 옥살이를 치렀다. 그 뒤 만주 요동 지역에서 10여 년 동안 활동하였고,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56년 3월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깊은 신심과 신학을 겸비한 장 주교는 이 땅에서 10년 동안 사목 활동을 하면서 배론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하고 서울에 인쇄소 두 곳을 설립하는 업적을 남겼다. 또한 당뇨병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사목에 힘쓰면서 여러 지역의 교우들을 열심히 돌보았다. 1866년 2월 23일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앞무릎에 곤장 열 대를 맞고도 고통스러운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며, 3월 7일 백 유스토, 서 루도비코, 김 헨리코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 동정 순교자 이영희는 경기도 봉천(奉天)에서 태어났다. 과부가 되어 친정에 돌아온 고모 이매임의 권면으로 어머니 허계임, 언니 이정희와 함께 어린 나이에 입교하였다. 성장하면서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하여 혼기에 이르자 혼담을 피해 호랑이에게 물려간 것처럼 꾸미고 상경하여, 이매임과 함께 살며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39년 김성임, 김 루치아, 어머니, 언니와 함께 자수한 뒤, 포청과 형조에서 일곱 번 형문(刑問)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아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3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경기도 봉천(奉天)에서 태어난 이정희는 과부가 되어 돌아온 고모 이매임(李梅任)의 권면으로 어려서 어머니 허계임(許季任), 동생 영희(英喜)와 함께 입교하였다. 그 뒤 열심한 신앙 생활을 하며 동정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였다. 혼기에 이르러 아버지가 외교인 청년과 결혼시키려 하자 병을 핑계삼아 3년을 버틴 뒤 교우 청년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한 지 2년 만에 남편을 잃고 잠시 친정에 있다가 신앙 생활을 위하여 집을 떠나 서울에 있는 고모 이매임의 집에 와서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시초에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감동하여 당시 이매임의 집에 머물던 김성임(金成任), 김 루치아 그리고 어머니, 동생, 고모 등과 함께 순교를 결심하고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지키고 있던 포졸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천주교인임을 밝혔다. 9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는 41세였다.

  • 프랑스 앙굴렘 교구 출신인 오 신부는 1862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1863년 6월에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았다. 경기도 수원 근처에 있는 샘골에서 한국말을 익혔으며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전교하였다. 1866년에 박해가 일어나고 그 해 3월에 안 주교가 체포되자 피신하려고 배를 탔으나, 거센 역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더리로 돌아와 체포되었다. 오 신부는 안 주교, 민 신부 등과 함께 서울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3월 30일 갈매못에서 안 주교 다음으로 두 번째 칼날을 맞아 29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한국 이름은 나 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로 1836년 1월 입국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제2대 교구장인 범 주교를 도와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선교하였다. 그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양업을, 3월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다가,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범 주교에 이어 자수하였다. 1839년 9월, 홍주에서 정(샤스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35세, 한국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 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Laurent-Joseph-Marius Imbert),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이며 주교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소(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제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의 입국으로 조선교구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나(모방), 정(샤스탕) 두 신부와 더불어 교구 설정 6년, 교회 설립 53년 만에 비로소 선교 체제를 갖추었으며, 1839년 초 신자수는 9천 명을 넘게 되었다. 그는 또한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뜻을 두어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을 뽑아 사제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불어닥친 박해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자신의 거처가 알려지게 되자 교우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다. 나, 정 두 신부에게도 인편으로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다같이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3세였으며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 만이었다.

  • 쟈크 오노레 샤스탕(Jacques Honore Chastan), 한국 이름은 정 아각백(鄭牙各伯). 두 번째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이다. 1827년 1월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가 된 정(샤스탕) 신부는 1836년 12월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나 신부와 함께 각 지방에 퍼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거행하였다.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린 다음 날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고난을 감수해 가며 오직 복음 전파에만 힘썼던 것이다.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는 이 땅을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피로 물들였고 정 신부도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그 해 9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그의 나이는 35세, 이 땅에 들어온 지 2년 9개월 만이었다.

  • 이호영은 경기도 이천(利川)에서 태어났으며, 신유박해 후 어머니와 과부가 된 누나 이소사 아가타(李召史)와 함께 입교하였다. 아버지가 대세를 받고 세상을 떠나자 서울로 이사하여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던 중, 중국인 신부 유방제(劉方濟)에게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35년 2월(음력 정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누나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한마디 비명도 지르지 않고 참아 내어 결국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때 결안(結案)의 犢聆僅价壞(邪學罪人)이라는 문구에 대하여, 천주교는 사학이 아니라 정도(正道)이며 거룩하고 참된 도(道)이기에 수결(手決:서명)할 수 없다고 버티자 포졸들이 강제로 수결시켰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연기되어 4년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누나 이소사 아가타와 함께 한날 한시에 순교하자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다가 1838년 11월 25일(음력 10월 8일) 긴 옥살이에서 얻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 ‘낙소’라고도 불렸던 장주기는 경기도 수원(水原)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군 양감면 육당리)에서 태어나 1826년에 세례를 받았다.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였고, 회장이 되어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에는 자신의 집을 임시 신학교로 내어 주고,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땅에서 농사일을 하며 잔일을 도맡아 하였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에서 신 신부와 박 신부가 체포되자 장주기는 제천 부근의 노럴골로 피신하였지만,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자수한 뒤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견뎌 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 거더리에서 끌려 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등과 함께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일명 ‘치장’으로도 불리는 최형은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태어나 14세 때 부모의 권면으로 입교하였는데, 그의 가족은 모두 열심한 신자였다. 1836년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던 신학생들 가운데 병사한 최방제(崔方濟)가 그의 동생이다. 큰누이는 평생 동정이었으며 형 최수(崔燧)는 병인박해 때에 절두산에서 참수되었다. 이렇게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자란 최형은 1836년 나 신부의 복사로 교회 일에 헌신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뒤 목수 일과 묵주 제작, 교회 서적 출판에 참여하였고, 장 주교가 입국한 뒤 교회 서적 출판의 책임자가 되어 큰 공로를 남겼다. 1866년 장 주교가 체포되면서 교회 서적들이 적발되자 전장운과 함께 체포되어 3월 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승운’이라고도 불렸던 손선지는 충청도 임천(林川)의 ‘괴인돌’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성품이 온순하고 착해 16세 때 정(샤스탕) 신부에게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순교할 때까지 회장직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병인 박해 때 그는 전주 지역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면서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12월 5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정문호, 한재권 등과 함께 전주 감영 후면옥에 갇혔다. 신문을 받다가 회장 신분이 탄로나, 관장에게 공소를 거쳐 간 서양 신부들의 이름과 교회 서적의 출처를 대라고 강요당하며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손선지는 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함께 체포된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다가,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숲정이에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47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았다.

  • ‘세필’로도 불렸던 우세영은 황해도 서흥(瑞興) 향교 마을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우연히 알게 된 김 요한이라는 회장의 권면으로 관직의 뜻을 버리고 서울로 내려가, 정의배에게 교리를 배우고 장(베르뇌) 주교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 뒤 부모의 반대를 인내와 열정으로 참아 내어 가족들을 입교시키고 신앙 생활을 위해 평안도 논재로 이사했다. 1866년 병인 박해가 일어나자 2월 16일 이웃 마을인 고둔리 공소에서 유정률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평양 감영에서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곧 배교한 것을 후회하고 서울로 내려가 스승 정의배를 만나러 갔다가, 이미 체포된 정의배의 집을 지키고 있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같은 해 3월 11일 신 신부, 박 신부, 스승 정의배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하였다.

  • 프랑스 뤼송 교구 출신인 김 신부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으로 1864년에 사제품을 받고 듬해 5월 조선에 입국하여 용인 손골에 부임하였다. 순교하는 날까지 운명을 함께한 서 신부와 가깝게 지냈으며, 한국말은 서툴렀지만 천성이 온순하고 친절하여 교우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손골에서 지내는 동안 교우들이 자신을 ‘김 신부’라고 부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기뻐하였는데, 그것은 한국에 김씨 성을 가진 순교자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과연 김 신부는 자신의 소원대로 입국한 지 10개월 만인 1866년 2월 체포되어, 3월 7일 새남터에서 동료 사제들과 함께 27세의 나이로 참수되었다.

  • 경기도 광주 구산(龜山)에서 부유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성우는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모든 이에게 존경을 받았다. 천주교를 알게 되자 두 동생과 함께 곧 입교하였고, 열렬한 신앙으로 전교 활동을 펼쳐 자신이 사는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세례를 받고 서울로 이사한 뒤 자신의 집에 공소를 만들어 신부들을 도왔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었으나 미리 피신하였고, 고향에 남아 있던 두 동생(김덕심 아우구스티노와 김윤심 베드로 알칸타라)만 체포되었다. 그러나 김성우도 이듬해 1월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감옥에서도 외교인 죄수들에게 전교하여 2명을 신앙의 길로 인도하였다. 옥살이 15개월 만인 1841년 4월 28일 치도곤 60대를 맞고 이튿날 교수형을 받아 4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1866년 병인 박해 때에 순교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인 백 신부는 프랑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64년에 사제가 되었다. 수품 직후 동료인 김 헨리코, 민 루가, 서 루도비코 신부와 함께 고국을 떠나 이듬해인 1865년 5월 조선에 입국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백 신부는 정의배(丁義培) 회장의 집에 머물며 한국말을 배워, 박해가 시작될 무렵에는 교우들에게 고해성사를 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정 회장이 체포된 다음 날인 1866년 2월 26일 장 주교의 하인이었던 이선이(李先伊)의 고발로 체포되어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3월 7일 새남터에서 28세의 나이로 장 주교와 함께 처형되었다.

  • ‘재건’이라고도 불렸던 황석두는 충청도 연풍(延豊)의 양반 가문에서 자라나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 시험을 치르러 상경하다가,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하였다.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하며 교리서를 탐독하였고, 이에 감동한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덕행이 뛰어나고 교리 지식이 풍부하여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고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고 독신 생활을 하였으며, 안 주교를 도와 교리서 번역과 교회 서적 출판에도 참여하였다. 1866년 3월에 먼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던 안 주교를 몇십 리나 따라간 황석두는 결국 함께 체포되어,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5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한때 ‘원서’라고도 알려졌던 한재권은 충청도 진잠(鎭岑)의 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를 본받아 독실한 신앙 생활을 하였고 진잠 지역 회장이 되었다. 박해를 피해 전주 대성동으로 이사한 다음에는 직책 없이 교회 일을 하였다. 1866년 12월 5일 손선지, 정문호 등과 함께 체포되자 그의 아버지는 친구를 통해 아들이 석방되도록 교섭하는 한편 감옥을 찾아와 배교하라고 간청하였지만, 한재권은 끝내 아버지의 간청을 거절하고 12월 13일 숲정이에서 31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 ‘재덕’으로도 불렸던 이명서는 충청도 출신으로, 박해를 피해 여러 곳을 유랑하다가 병인 박해가 일어나기 몇 해 전부터 전주 성지동에 정착하였다. 1866년 12월 5일 포졸들이 성지동을 습격하자 이명서는 조화서의 피신 권유를 뿌리치고 병든 몸으로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관장은 병자인 이명서를 배교시키기 쉬울 것으로 생각하여 가장 먼저 신문하고 혹형과 고문으로 강요하였지만, 그는 배교를 거부하고 함께 체포된 교우들과 열심히 기도하며 순교를 준비하였다.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숲정이에서 4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계식’으로도 불렸던 정문호는 충청도 임천(林川) 출신으로, 고향에서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여 독실한 신앙 생활을 하였다. 박해를 피해 여러 지역을 유랑하다가 병인 박해 무렵에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정착하였는데, 품행이 단정하고 성품이 강직하여 교우들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평판이 좋았다. 1866년 12월 초 사람을 시켜 전주 감영의 동태를 살피게 하였지만, 미처 소식이 돌아오기도 전에 손선지, 한재권 등과 함께 체포된 뒤 12월 13일에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6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는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오늘 우리는 천국으로 과거 보러 가는 날이다. 오늘은 정말 기뻐해야 할 날이다." 하며 진심으로 순교를 기뻐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