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기록
관변 기록 (일성록)
1868년 8월 4일
위에서 소개한 8위 순교자의 참수 사실을 관변 기록인 일성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慶尙左水使 具胄元以邪學罪人李廷植 李月柱朴召史李寬福 李三根 車長得 梁在鉉玉召史等梟警啓(경상좌수사 구주원이 사학 죄인 이정식, 이월주, 박조이, 이관복, 이삼근, 차장득, 양재현, 옥조이 등을 효수하였다고 아뢰었다)
1868년(무진년) 8월 4일(양력 9월 19일), 수영 장대에서 참수형을 받으며
신앙을 증거한 부산지역 8위 순교자의 생애와 순교 과정을 소개합니다.
복자 · Beatus
Joannes · 요한
1796 - 1868
동래지역 천주교 회장
무과 급제 · 교련관
8위 중 연장자 · 첫 번째 순교

이정식 요한은 동래지역 천주교 회장이다(이정식은 이후에 이순식으로 개명하였다). 1846년 준호구를 보면 그가 동래 읍내면 동부 생민리에 거주하였고, 동래지역 무임武任으로 무과에 급제한 후 교련관 등 여러 무임직을 역임한 것을 알 수 있다. 언제, 어떤 계기로 입교하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의 부인은 홍주 출신으로 훗날 문경으로 이주하여 ‘영남회장’이란 별명을 가진 박 요한의 누이였다. 그리고 124위 순교복자 박경화 바오로가 그들의 할아버지이고, 순교복자 박사의 안드레아가 그들의 아버지이다. 아울러 대구대교구 순교 성인 이윤일 요한은 박 요한의 또 다른 누이와 결혼한 이로 이정식 요한과 처남 사이가 된다. 이처럼 부인 박씨와의 결혼 그리고 이를 통해 맺어진 인적 관계가 그의 입교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이정식은 60세라는 늦은 나이에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한 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가족들을 권면하여 입교시켰으며 누구보다 수계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화려한 의복을 피하고 검소한 음식을 먹으며 애긍에 힘쓰면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 작은 방을 만들어 십자고상과 상본을 걸고 묵상과 교리공부에 열중하였다.
이러한 열성을 인정받아 이정식은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래지역 교우들의 리더인 회장이 되었고 언제나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다.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들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울산(수박골:현 호계성당 관할 구역)으로 피신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나 1868년 동래지역 신자들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그 이름이 알려졌고, 포졸들은 그가 사는 곳을 수소문하여 거주지를 찾아내고 그곳에 있던 교우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그때 아들 이월주(1827~1868) 등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정식은 스스로 포졸들 앞에 나와 자수하였다.
동래로 압송된 이정식은 그곳에서 대자인 양재현을 만나 서로 위로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자고 다짐하였다. 이정식은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문초를 받게 되자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많은 교우를 가르쳤다는 것도 시인하였다.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이정식은 아들 이월주, 며느리 박조이(1822~1868) 등과 함께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47일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868년 9월 19일 수영장대에서 여덟 명의 순교자 중에 가장 먼저 칼을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그는 참수형을 당하기에 앞서 삼종기도를 바치고 십자성호를 그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 마리아’ 두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친척들에 의해 거두어져 부산 가르멜 수녀원 뒷산(동래구 명장동 산96)에 묻혔다가 1977년 9월 19일 오륜대순교자성지 뒤편 언덕에 옮겨 안장되었다.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이정식의 천주교 행적과 기록
이정식의 천주교 행적과 관련해서는 교회 측 자료인 치명일기 외에도 동래지역 지배 조직의 자료와 이정식 가문 전승 고문서 자료에서도 입증된다. 동래지역 각종 군사기구의 구성원 명단을 수록한 무청선생안武廳先生案에 이정식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천주교에 입교한 사학죄인이기 때문에 이 명단에서 이름을 지운 흔적을 볼 수 있는데, 9군데에서 이정식의 이름이 묵삭墨削[먹으로 글씨를 지움]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름이 삭제된 것은 무임조직의 이탈자에 대한 규제와 함께 후손들의 무임직 진출 기회를 박탈하는 상징적 의례였다.
"예수, 마리아." — 참수 직전 마지막으로 부른 이름
신분과 배경
동래지역 천주교 회장 (이후 이순식으로 개명). 1846년 준호구 기록상 동래 읍내면 동부 생민리 거주, 무과 급제 후 교련관 등 여러 무임직 역임. 부인은 홍주 출신으로 '영남회장' 박 요한의 누이이며, 순교복자 박경화 바오로가 처가의 할아버지, 순교복자 박사의 안드레아가 처가의 아버지. 대구대교구 순교 성인 이윤일 요한과는 처남 사이.
신앙생활
60세라는 늦은 나이에 입교. 가족들을 권면하여 입교시켰으며, 화려한 의복을 피하고 검소한 음식을 먹으며 애긍에 힘쓰고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함. 작은 방에 십자고상과 상본을 걸고 묵상과 교리공부에 열중.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래지역 교우들의 회장이 됨.
체포와 순교
1866년 병인박해 발생 시 가족과 함께 기장·경주를 거쳐 울산(수박골)으로 피신하였다. 1868년 아들 이월주 등이 체포되자 스스로 자수하여 동래로 압송되었고, 대자 양재현과 재회하여 신앙을 굳게 지키기로 다짐. 문초 중 천주교 신자임과 많은 교우를 가르쳤음을 시인하고 배교를 거부하였으며, 47일간 옥살이 후 1868년 9월 19일 수영장대에서 8위 중 가장 먼저 참수되었다.
기록
치명일기 외에 동래지역 무청선생안(武廳先生案)에서도 이름이 확인되며, 천주교 입교(사학죄인)로 인해 9군데에서 이름이 먹으로 지워진(묵삭) 흔적이 남아있음. 이는 무임조직 이탈자 규제와 후손의 무임직 진출 기회 박탈을 상징한다.
Franciscus · 프란치스코
1827 - 1868
이정식 요한의 아들
이정식 요한의 아들로, 부친과 함께 체포되어 순교하였습니다. 치명일기에는 '요한의 아들이라 그 부친과 한가지로 잡혀 치명하니라'로 기록되어 있으며, 관변 자료(일성록)의 '李月柱'와 동일 인물로 추정됩니다. 병인치명사적에도 이정식 항목에 '子 프란치스코'로 성과 세례명만 기록.
Maria · 마리아
1822 - 1868
이정식 요한의 며느리
이월주 프란치스코의 아내
치명일기에 박 마리아로 ‘이 방지거의 아내니 장부와 한가지로 잡혀 치명하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병인치명사적에는 이정식 항목에 婦 박 마리아로 기록되어 있다. 관변 측 자료에 나오는 박 조이(召史)와 동일 인물로 보인다(일성록 참조).
Petrus · 베드로
? - 1868
이정식 요한의 조카로 추정
치명일기에 이 요한의 조카, ‘이 요한과 한가지로 잡혀 치명하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병인치명사적에는 이정식 항목에 侄 베드로라고 기록되어 있다. 관변 측 자료에 나오는 李寬福과 동일 인물로 보인다(일성록 참조).
복자 · Beatus
Martinus · 마르티노
1827 - 1868
동래 좌수(座首)
이정식의 대자(代子)
8위 중 두 번째 순교

양재현 마르티노는 동래 북문 밖 실내동[현 금정구 금사동]에 살았던 좌수座首이다. 좌수는 향임鄕任, 즉 지방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 기관인 유향소의 벼슬로 그 위세나 영향력에 있어서 중요한 엘리트 직임이었다. 따라서 그가 학식과 명망을 어느 정도 갖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거주지가 북문 밖이라는 점에서 이정식의 거주지인 읍내와는 구분되지만 읍치邑治[관아가 있는 행정 중심지]와 비교적 가까웠다. 그의 입교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정식을 대부로 정한 것으로 보아 이정식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후 그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만 하더라도 양반 중심의 신분제 사회였는데, 명망 있는 좌수 양재현이 양반이라 할 수 없는 이정식을 대부로 삼았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병인박해 시기인 1868년 음력 2월 16일(양력 4월 8일), 양재현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알려져 동래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포졸들이 집으로 들이닥치자 태연하게 그들을 맞이한 뒤 관아로 끌려갔다. 관장 앞에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양재현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는 형벌을 달게 받았다. 또한 관장이 배교를 강요하자 “절대로 천주교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매를 맞고 옥에 갇혀 있다가(20일) 수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다시 문초를 받았지만 배교를 거부함으로써 매를 맞고 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옥사장이 돈을 요구하자, 양재현은 돈을 주겠다고 약속한 뒤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그가 집으로 돌아간 후, 옥졸이 관장에게 가서 ‘죄수가 몰래 도망쳤다’고 보고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즉시 포졸들이 다시 마르티노의 집으로 몰려갔고, 그는 곧장 체포되어 다시 동래 관아로 압송되었다.
이때 그는 부인 최마리아에게 자기와 함께 가자고 말하였으나 부인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들 벨라도와 며느리 엘리사벳을 보고 “너희도 나를 따라 함께 가자. 천주께서 부르시니 영복을 받으러 가자”하였으나 그들 역시 아무 대답도 없었다고 한다. 이에 양재현은 부인과 아들에게 “임자와 아이들이 나와 함께 가기 싫어하니 그만 두어라. 내가 이 길을 떠나면 언젠가 우리는 천국에서 만날 것이다. 부디 주님 뜻대로 살아가도록 열심히 기도하여라”하고 당부하며 포졸들을 따라 나섰다.
관장 앞으로 끌려간 양재현은 “천지의 큰 부모이신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신앙을 증언하고 매를 맞고 옥에 갇힌다. 그리고 이후(5일 후) 통영으로 이송되어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았다. 통영은 경상 우수영의 본거지로 수군통제사영이 있던 곳으로 여기서 양재현은 인두로 등과 수족을 지지는 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받는다.
이후 다시 동래 관아로 끌려온 양재현은 옥중에서 대부인 이정식과 동료 교우들을 만나 서로를 위로하면서 신앙을 굳게 지키기로 약속하였다. 이정식 요한과 동료 교우들이 9월 19일 형을 받기 전 47일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고 한다면 그들이 옥중에 있던 양재현 마르티노를 만난 시점은 8월 초가 될 것이다. 아무튼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결정하고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 수영장대로 압송하였다. 양재현은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십자성호를 그은 다음 이정식 다음으로 칼을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42세였고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졌다.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양재현에 대한 기록
병인치명사적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양재현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도 천주교 신자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 최 마리아, 아들 베르나르도(16세), 며느리 엘리사벳(19세)은 그 당시 구금되지 않았고, 이후 형장에서 양재현의 처형을 지켜보았다.
신분과 배경
유향소의 벼슬로 중요한 엘리트 직임. 학식과 명망을 갖춘 인물. 이정식을 대부로 삼아 입교한 것으로 추정
체포와 순교 과정
1868년 음력 2월 16일(양력 4월 8일) 동래 포졸들에게 체포.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태연하게 그들을 맞이한 뒤 관아로 끌려감. 관장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며 신자임을 밝히고 형벌을 받음. 배교를 강요하자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음. 매를 맞고 옥고(20일) 후 수영으로 이송, 재차 매를 맞고 옥에 수감. 옥사장이 돈을 요구하자 돈을 주겠다고 약속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가 죄수가 몰래 도망쳤다는 보고로 인해 다시 체포되어 동래 관아로 압송. 이때 부인 최마리아에게 함께 갈 것을 권했으나 답이 없었고, 아들 벨라르와 며느리 엘리사벳에게는 “천주께서 부르시니 영복을 받으러 가자”고 하였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고 함. 이에 “내가 이 길을 떠나면 언젠가 우리는 천국에서 만날 것이다. 부디 주님 뜻대로 살아가도록 열심히 기도하여라”고 당부하며 포졸을 따라 나섬. 5일 후 통영으로 이송되어 인두로 등과 수족을 지지는 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받음. 다시 동래로 끌려와 옥중에서 대부 이정식과 교우들을 만나 신앙을 지키기로 약속. 47일 간 옥살이 후, 1868년 9월 19일 수영장대에서 신자성호를 그은 다음 이정식 다음으로 참수
기록
병인치명사적에 따르면 아내 최 마리아, 아들 베르나르도(16세), 며느리 엘리사벳(19세)도 신자였으나 당시 구금되지 않았고, 형장에서 처형을 지켜보았다.
Jacobus · 야고보
? - 1868
서울 출신
병인치명사적 이정식 항목에 ‘본디 서울 사람으로 동래에 와서 이 요한 세례자와 피신하다가 한가지로 동일 치명하니, 나이는 50세이어라’, ‘京人 이 야고보’로 기록되어 있다. 관변 측 자료에 나오는 李三根과 동일 인물로 보인다(일성록 참조).
Franciscus · 프란치스코
? - 1868 · 약 50세
부산 출신
치명일기에는 차 방지거로 기록되어 있다. ‘이 요한과 한가지로 잡혀 치명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병인치명사적에는 “차 프란치스코는 본디 부산 살다가 군난에 피하여 울산 내황(울산 중구 반구동)에 있더니 동래 포교에게 잡혀 이 요한 세례자와 한가지로 치명하니, 나이는 근50세러라.”고 적혀 있다.
Barbara · 바르바라
? - 1868
동래 출신
두 번의 박해를 견딘 순교자
치명일기에는 옥 발바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위에 사람들과 한 가지로 치명하니라.’ 또 다른 항목에서는 ‘동래 사람이라 병인년에 통영으로 잡혔다가 나왔더니 무진년에 다시 동래에서 잡혀 장대에 나아가 참수치명하니, 나이는 오십일세라.’고 기록되어 있다. 병인치명사적에는 “옥 바르바라는 본디 동래 이불(二佛)에 살다가 군난에 피하여 동래 동문 안에 있다가 본읍 포교에게 잡혀 이 요한 세례자와 한가지로 치명하니라.”고 적혀 있다.
역사 기록
1868년 8월 4일
위에서 소개한 8위 순교자의 참수 사실을 관변 기록인 일성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慶尙左水使 具胄元以邪學罪人李廷植 李月柱朴召史李寬福 李三根 車長得 梁在鉉玉召史等梟警啓(경상좌수사 구주원이 사학 죄인 이정식, 이월주, 박조이, 이관복, 이삼근, 차장득, 양재현, 옥조이 등을 효수하였다고 아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