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 Beatus

이정식

Joannes · 요한

1796 - 1868

동래지역 천주교 회장

무과 급제 · 교련관

8위 중 연장자 · 첫 번째 순교

이정식 요한

이정식 요한은 동래지역 천주교 회장이다(이정식은 이후에 이순식으로 개명하였다). 1846년 준호구를 보면 그가 동래 읍내면 동부 생민리에 거주하였고, 동래지역 무임武任으로 무과에 급제한 후 교련관 등 여러 무임직을 역임한 것을 알 수 있다. 언제, 어떤 계기로 입교하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의 부인은 홍주 출신으로 훗날 문경으로 이주하여 ‘영남회장’이란 별명을 가진 박 요한의 누이였다. 그리고 124위 순교복자 박경화 바오로가 그들의 할아버지이고, 순교복자 박사의 안드레아가 그들의 아버지이다. 아울러 대구대교구 순교 성인 이윤일 요한은 박 요한의 또 다른 누이와 결혼한 이로 이정식 요한과 처남 사이가 된다. 이처럼 부인 박씨와의 결혼 그리고 이를 통해 맺어진 인적 관계가 그의 입교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이정식은 60세라는 늦은 나이에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한 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가족들을 권면하여 입교시켰으며 누구보다 수계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화려한 의복을 피하고 검소한 음식을 먹으며 애긍에 힘쓰면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 작은 방을 만들어 십자고상과 상본을 걸고 묵상과 교리공부에 열중하였다.

이러한 열성을 인정받아 이정식은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래지역 교우들의 리더인 회장이 되었고 언제나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다.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들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울산(수박골:현 호계성당 관할 구역)으로 피신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나 1868년 동래지역 신자들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그 이름이 알려졌고, 포졸들은 그가 사는 곳을 수소문하여 거주지를 찾아내고 그곳에 있던 교우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그때 아들 이월주(1827~1868) 등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정식은 스스로 포졸들 앞에 나와 자수하였다.

동래로 압송된 이정식은 그곳에서 대자인 양재현을 만나 서로 위로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자고 다짐하였다. 이정식은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문초를 받게 되자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많은 교우를 가르쳤다는 것도 시인하였다.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이정식은 아들 이월주, 며느리 박조이(1822~1868) 등과 함께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47일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868년 9월 19일 수영장대에서 여덟 명의 순교자 중에 가장 먼저 칼을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그는 참수형을 당하기에 앞서 삼종기도를 바치고 십자성호를 그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 마리아’ 두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친척들에 의해 거두어져 부산 가르멜 수녀원 뒷산(동래구 명장동 산96)에 묻혔다가 1977년 9월 19일 오륜대순교자성지 뒤편 언덕에 옮겨 안장되었다.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이정식의 천주교 행적과 기록

이정식의 천주교 행적과 관련해서는 교회 측 자료인 치명일기 외에도 동래지역 지배 조직의 자료와 이정식 가문 전승 고문서 자료에서도 입증된다. 동래지역 각종 군사기구의 구성원 명단을 수록한 무청선생안武廳先生案에 이정식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천주교에 입교한 사학죄인이기 때문에 이 명단에서 이름을 지운 흔적을 볼 수 있는데, 9군데에서 이정식의 이름이 묵삭墨削[먹으로 글씨를 지움]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름이 삭제된 것은 무임조직의 이탈자에 대한 규제와 함께 후손들의 무임직 진출 기회를 박탈하는 상징적 의례였다.

"예수, 마리아." — 참수 직전 마지막으로 부른 이름

  • 순교일

    1868년 9월 19일

    수영 장대 · 참수형. 삼종기도와 십자성호를 그은 후 순교 (당시 75세)

  • 시복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복자품에 오름 (광화문 광장)

  • 안장

    시신은 부산 가르멜 수녀원 뒷산(동래구 명장동 산96)에 안장되었다가 1977년 9월 19일 오륜대순교자성지로 이장

신분과 배경

동래지역 천주교 회장 (이후 이순식으로 개명). 1846년 준호구 기록상 동래 읍내면 동부 생민리 거주, 무과 급제 후 교련관 등 여러 무임직 역임. 부인은 홍주 출신으로 '영남회장' 박 요한의 누이이며, 순교복자 박경화 바오로가 처가의 할아버지, 순교복자 박사의 안드레아가 처가의 아버지. 대구대교구 순교 성인 이윤일 요한과는 처남 사이.

신앙생활

60세라는 늦은 나이에 입교. 가족들을 권면하여 입교시켰으며, 화려한 의복을 피하고 검소한 음식을 먹으며 애긍에 힘쓰고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함. 작은 방에 십자고상과 상본을 걸고 묵상과 교리공부에 열중.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래지역 교우들의 회장이 됨.

체포와 순교

1866년 병인박해 발생 시 가족과 함께 기장·경주를 거쳐 울산(수박골)으로 피신하였다. 1868년 아들 이월주 등이 체포되자 스스로 자수하여 동래로 압송되었고, 대자 양재현과 재회하여 신앙을 굳게 지키기로 다짐. 문초 중 천주교 신자임과 많은 교우를 가르쳤음을 시인하고 배교를 거부하였으며, 47일간 옥살이 후 1868년 9월 19일 수영장대에서 8위 중 가장 먼저 참수되었다.

기록

치명일기 외에 동래지역 무청선생안(武廳先生案)에서도 이름이 확인되며, 천주교 입교(사학죄인)로 인해 9군데에서 이름이 먹으로 지워진(묵삭) 흔적이 남아있음. 이는 무임조직 이탈자 규제와 후손의 무임직 진출 기회 박탈을 상징한다.

역사 기록

관변 기록 (일성록)

1868년 8월 4일
위에서 소개한 8위 순교자의 참수 사실을 관변 기록인 일성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慶尙左水使 具胄元以邪學罪人李廷植 李月柱朴召史李寬福 李三根 車長得 梁在鉉玉召史等梟警啓(경상좌수사 구주원이 사학 죄인 이정식, 이월주, 박조이, 이관복, 이삼근, 차장득, 양재현, 옥조이 등을 효수하였다고 아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