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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성인 26위

* 오륜대 순교자 성지 26위 성인유해 *

1. (1.)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71~1846) ☞ 발 뼈

  한국교회의 첫 번째 신부로서 거룩하게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신앙과 활동력으로 빛나는 일생을 보냈고 죽음 또한 빛나고 장렬한 것이었다. 1821년 충청도 솔뫼, 구 교우 집안에서 태어난 김 대건은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와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드러내 나(모방) 신부는 마침내 그를 다른 소년 두 명과 함께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 때는 1836년, 그의 나이 15세일 때였다.
  그는 그곳에서 최 양업 (崔良業, 토마스), 최 방제 (崔方濟, 프란치스코: 수학 중 병사) 등 두 소년과 함께 6년간이나 신학 공부를 하였으며 현지에서 발생한 민란 때문에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어쨌든 신학 공부를 하던 그는 기회가 오자 귀국 길에 오르게 되어 우선 요동지방에 와서 대기 중이던 고(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입국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그는 1743년 음력 11월, 변문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때마침 북경으로 가던 김 프란치스꼬를 만나 고국의 박해 소식을 듣는다. 그의 말인즉 국내에는 아직 박해 위험이 남아있을 뿐더러 선교사의 거처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만큼 그들의 입국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독으로라도 입국할 것을 결심하고 혼자서 국경을 넘어 의주까지 잠입했다. 김 대건은 의주에서 하룻밤 묵는 동안 포졸에게 발각되어 하는 수 없이 그들을 피해 요동으로 되돌아왔으며 한편 북경으로 갔던 김 프란치스코는 국경에서 그 이듬해 김 대건과 다시 만나고 주교의 입국 시기를 음력 11월로 잡고 헤어졌다. 그러는 동안 김 대건은 부제품을 받았고 약속 시기에 마중 나온 김 프란치스꼬 일행과 같이 서울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국내 사정을 고려하여 고 주교는 동반치 않았다.
  김 부제는 서울에 들어오자 수개월에 걸쳐 오직 주교와 외국인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기 위한 만반 준비를 갖추는 데 진력했고 마침내는 10여명의 사공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신품을 받아 드디어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으며 그후 갖은 고난을 겪어가며 고 주교와 안(다블뤼) 신부를 배로 모시고 황해를 건너 조선 땅인 강경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약 2개월 간 휴식 후 곧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기 시작했다.
  김 신부가 성사를 집전한 곳은 서울과 용인지방이었으며 당시의 교우들 증언에 따르면 김 신부는 활발한 성격에 얼굴은 고아하고 허위대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모친과도 상봉하여 얼마간 같이 머무를 수 있었으나 1846년 음력 4월이 되자 주효의 명에 따라 황해도지방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구라파로 보내는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하는 길을 새로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이 황해도 지방에의 항해길이 마지막 그의 순교길이 되고 말았다. 그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곳 관에서는 중국 배들을 쫓으려고 때마침 조선 배를 징발 중이었는데 김 신부의 "양반 배를 어찌 징발할 수 있느냐"는 항의가 도화선이 되어 결국 잡히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김 신부는 그곳에서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문초 끝에 교회 일이 드러나자 마침내 서울 좌포도청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중국 배에서 압수된 주교 편지가 "네 글씨와 다른데, 누구의 것이냐"라는 문초에 "철필과 새털로 쓴 글씨는 다르기 마련이며 철필이 있으면 이렇게 쓸 수 있다"는 말로 위기를 넘기는 기지를 보이기도 했으며 그의 넓은 견식과 당당한 태도는 대관들로 하여금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는 말들을 하게끔 했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 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이 선고되고 말았다. 김 신부의 처형은 9월 16일 새남터에서 모든 것이 군문효수의 절차에따라 진행되었다 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 "너희들도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 이 때 피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소리와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2. (85.) 성 남종삼(南鍾三) 요한 (1817~1866) ☞ 척추 뼈

  자는 증오(曾五), 본관은 의령(宜寧). 성 남종삼 요한은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남상교(南尙敎)의 양자가 되었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군수가 된 성인은 항상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淸白吏)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관직에 따르는 미신행위로 인해 한때 교회를 떠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63년 대원군의 명으로 정 3품 승지(承旨)가 되어 왕족 자제의 교육을 맡았다. 그러던 중 1866년초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조정에서 문제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남종삼은 홍봉주, 이유일 등과 의논하여 영․불(英․佛)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자는 소위 방어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대원군과 장 시므온 주교와의 면담이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척신들의 압력, 장 주교와의 연락 지연,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 소문 등으로 실패했을 뿐더러 태도가 돌변한 대원군에 의해 병인 대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1866년 2월 고향인 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그는 중도에서 자신의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고양군 축베더리로 피신했으나 2월 25일 주교의 하인 이선이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국청에서 여섯 차례의 국문(鞠問)을 받고 3월 7일 5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홍봉주와 함께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3. (90.)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Daveluy) 주교 (1817~1866) ☞ 발 뼈

  한국 이름은 안돈이(安敦伊), 조선교구 제 5대 교구장.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는 한불사전, 「신명초행」, 「영세대의」등 많은 번역과 저서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10여년에 걸친 각고 끝에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순교자 비망기」를 만들어내는 큰 업적을 이룩했다.
  프랑스 '아미앙'의 상류 가정에서 자란 관계로 한국 풍속에 익숙해지기가 퍽 어려웠고 더더욱 위장병과 신경통으로 고통이 심하였으나 굳은 의지로써 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고 한국말을 잘하고 또 보신탕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이었다. 그는 김대건 신부의 저 유명한 '라파엘'호를 타고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하여 전교 신부로 12년, 보좌주교로 9년, 그리고 제 5대 교구장으로 22일, 실로 20여 년 간 이 땅의 양떼를 위해 봉사하다 마침내는 순교의 영광까지 누렸다.
  안 주교는 병인년 박해가 일어나자 3일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동반 순교자인 민 신부와 주교의 복사 황석두 루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는테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너 포악한 형벌을 받았다. 때마침 왕이 병중이고 또 곧 결혼하게 되어 그의 처형은 서울 대신 충청도 수영 ‘갈매못’으로 결정되었다. 안 주교일행(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장주기)은 곧 서울을 떠나 3월 30일 수영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형리들은 주교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했는데 마침 이날이 ‘예수 수난 축일’이었으므로 안 주교는 그들의 계획을 반대하고 당일 사형집행을 굳이 요구하여 청대로 실행되었다.
  형장인 ‘갈매못’은 수영에서 약 10리 떨어진 보령지방의 강가인데 순교 장면의 목격자인 이 힐라리오는 "포졸이 맨 먼저 주교를 칼로 쳤다. 목이 완전히 베어지지 않고 반만 잘렸다. 주교의 몸이 한 번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렇게 망나니가 목을 반만 벤 다음 수사에게 자기의 수고 값으로 양 400꿰미를 요구했다. 수사는 주겠다고 승낙했다. 망나니는 다시 안 주교에게 다가가 한 번 더 목을 치니 안 주교의 목이 몸에서 완전히 떨어졌다"고 전했다. 안 주교의 그때 나이는 49세, 그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바로 그날 어쩌면 바로 그 시간에 순교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4. (36.) 성녀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 (1773~1839) ☞ 목 뼈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태어난 허계임 막달레나는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 온 시누이 이매임 데레사로부터 천주교를 알게 되자 이정희와 영희 두 딸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했다. 1839년 3월, 허계임은 성사를 받으러 당시 시흥지방 봉천(奉天)에서 상경하여 시누이와 두 딸이 살고 있는 집에 머물게 되었다.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시누이와 두 딸 그리고 김성임, 김 루치아 등과 순교를 결심하고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자헌했다. 포청과 형조에서 허계임은 배교를 강요하는 수차의 형문을 당했으나 다 이겨내고,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니 그의 나이 67세였다.

5. (31.) 성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1805~1839) ☞ 손 뼈

  ‘영눌’ 또는 ‘치운’으로도 불리던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홍주(洪州)지방 다랫골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한국교회의 창설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온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성장해서는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곳을 찾아 다니다가 가족들을 설득하는데 성공,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했다. 그러나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城), 경기도 부천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건설했다. 1836년 아들 최양업(崔良業)을 나(모방) 신부에게 보내어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하게했다. 그는 1839년 초에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교우촌 교우와 가족 도합 4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수리산에서 서울의 포청까지 끌려간 최경환은 2개월 동안 하루 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해 태장 340도, 곤장 110도를 맞았다. 9월 11일 최후로 곤장 25도를 맞고는 그 이튿날 옥사, 순교했다. 그때 그의 나이 35세였다.

6. (91.) 성 민 루가 위앵 (Huin) 신부 (1836~1866) ☞ 발 뼈

  한국 성은 민(閔), 1866년 병인 박해 때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프랑스 '랑그르'교구 출신인 민 신부는 1861년 사제가 된 후 1865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는 도착지인 충청도 내포에 머물면서 안 주교로부터 한국말을 배운 후 홍주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안 주교의 지시로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악형을 겪은 후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형장이 충청도 수영으로 결정되어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3월 30일 수영에 도착, 그곳 ‘갈매못’에서 당일로 군문효수되었다. 그는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 품에 안겼다.

7. (84.) 성 서 루도비코 볼리외 (Beaulieu)신부 (1840~1866) ☞ 손 뼈

  한국 이름은 서몰례(徐沒禮), 1866년 병인 박해 때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서 신부는 1840년 프랑스 ‘보르도’ 교구에서 태어나 1864년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에 백, 김, 민 세 신부와 함께 충청도 내포에 도착 입국하였다. 그는 고백을 들을 만큼 한국말을 배운 후 공주지방 전교를 맡게 되었으나 임지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펴볼 겨를도 없이 박해를 맞았다. 서 신부는 장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광주 근처 교우집에 피해 있었으나 2월 27일 포졸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에도 고통을 감수하였고 한국말이 서툴다는 핑계로 여러 질문에 일절 대답을 회피하였다. 마침내 3월 7일 서 신부는 장 주교를 선두로 동료인 백, 김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되니 그때 나이 26세였다.

8. (81.) 성 장 시므온 베르뇌(Berneux) 주교 (1814~1866) ☞ 손 뼈

  한국 이름은 장경일(張敬一), 조선교구 제 4대 교구장이다. 성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는 이 땅에서의 10년 간 사목활동 중 배론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하고 서울에 두 개의 인쇄소를 설치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며 역사상 가장 혹독했던 1866년의 병인 대박해로 순교하여 주님의 품에 안겼다. 프랑스의 ‘르망’ 교구 출신인 장 주교는 1837년 사제로 서품되어 동양 포교지의 하나인 월남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체포되어 2년간의 감옥생활을 치르고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다행히 석방되어 만주 요동지방에서 10여 년 간 활동하였으며, 그곳에서 조선교구 제 4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56년 3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천사적인 신심과 깊은 신학 지식을 겸비한 드문 능력가였던 그는 엄한 극기 생활과 당뇨병에서 오는 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사목에 주력했으며 바쁜 주교직을 수행하면서도 신부 3, 4인이 맡아 볼 그런 넓은 지역을 직접 도맡아 보았다. 과연 한국교회는 그의 밑에서 놀라운 발전을 보았으며 교우들은 더 잘 교육되고 신자 수는 배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1866년 2월 뜻밖에도 모진 박해가 일어나 2월 23일에 체포되었다. 장 주교는 신문을 받을 때 자기가 이 땅에 온 것은 오로지 한국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따라서 강제로 끌려가기 전에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뜻을 밝혔다. 그는 감옥에서 앞 무릎에 곤장 열 대를 맞았으나 얼굴에 고통의 빛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며 3월 7일 백, 서, 김 세 신부와 함께 새남터 형장으로 향하였다.
  당시 군인으로서 장 주교의 순교 장면을 목격한 박 베드로는 그의 순교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형장에 이르자 주교와 세 신부의 옷을 벗겼다. 이어 사형선고문의 낭독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들은 형벌을 받는 동안 즐거워 보였다. 마침내 망나니의 두 번째 칼날에 당년 52세인 장 주교의 목은 땅에 떨어졌다.”

9. (22.) 성녀 이영희(李英喜) 막달레나 (1809~1839) ☞ 손 뼈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이 영희 막달레나는 경기도 봉천(奉天)에서 태어났다. 과부가 되어 친정에 돌아온 고모 이매임(李梅任)의 권면으로 어려서 어머니 허계임(許季任). 언니 이정희(李貞喜)와 함께 입교했다. 성장하면서 수정(守貞)할 것을 결심하여 혼기에 이르자 혼담을 피해 호랑이에게 물려간 것처럼 꾸미고 상경하여, 고모 이 매임의 집에 기거하면 수계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초, 체포된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교우들로부터 전해 듣고 감동하여 당시 고모에게 의탁하고 있던 김성임, 김루치아 그리고 어머니, 언니 이정희와 함께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지키고 있던 포졸들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자헌했다. 그후 포청과 형조에서 7차의 형문을 받고 드디어 사형을 선고받아 7월 20일 고모 이 매임을 포함한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호 순교했다 . 그때 나이 31세였다.

10. (28.) 성녀 이정희(李貞喜) 바르바라 (1799~1839) ☞ 손 뼈

  경기도 봉천에서 태어난 이정희 바르바라는 과부가 되어 돌아온 고모 이 매임(데레사)의 권면으로 어려서 어머니 허계임, 동생 영희와 함께 입교했다. 입교 이후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며 수정할 것을 결심했다. 혼기에 이르러 아버지가 외교인 청년과의 결혼을 강요하자 병을 핑계삼아 3년을 버턴 후 교우 청년과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한지 2년만에 남편을 잃은 후 잠시 친정에 있다가 신앙생활을 위해 집을 떠나 서울의 고모 이 매임의 집에 와서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시초에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고 감동하여 당시 이 매임의 집에 머물고 있던 김성임, 김 루치아 그리고 어머니, 동생, 고모 등과 함께 순교를 결심한 후 4원 11일 남명혁의 집을 지키고 있던 포졸에게 자헌하였다. 9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어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41세였다.

11. (92.) 성 오 베드로 오매트르(Aumaitre) 신부 (1837~1866) ☞ 턱 뼈

  한국성은 오(吳),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66년 병인년에 순교한 프랑스인 선교사. 프랑스 ‘앙굴램’교구 출신인 성 오 베드로 오매트르 신부는 1862년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인 1863년 6월 임지인 조선 땅을 밟았다. 그는 경기도 수원 근방 샘골에서 한국말을 익히고 곧 충청도 홍주의 ‘거더리’에서 전교에 종사했다. 그러나 1866년 박해가 일어나고 동년 3월 안 주교가 체포되자 한때 피신코자 배를 탔으나 거센 역풍으로 뜻을 못이루고 다시 ‘거더리’로 돌아와 즉시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그는 동반 순교자인 안 주교, 민 신부 등과 함께 일단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충청도 수영 ‘갈매못’에서 3월 30일 처형되었다. 오 신부는 안 주교 다음 두 번째 칼날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였다.

12. (33.) 성 나 베드로 모방(Maubant) 신부 (1804~1839) ☞ 머리카락

  한국명은 나 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서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 그는 1836년 1월 입국하여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까지 3년 9개월 간 헌신적인 포교활동을 폈으며 특히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된 김 대건과 최 양업, 최 방제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에 유학시킨 것으로노 유명하다.
  프랑스 베시에서 태어난 나(모방) 신부는 1831년 파리외방전교회 신덕가 되어 그 이듬해 동양에 진출, 중국을 거쳐 1836년 1월 의주의 변문을 통해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그는 서울에서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순회, 전교하였다. 또한 그는 이 땅에 들어오자 곧 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 양업을, 3월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이들 세 소년에게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장차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던 중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신부 유방제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시켰다.
  그 후 나 신부는 이들 세 소년을 전송한 교우들과 만나 1837년 1월 무사히 서울에 들어온 정(샤스탕) 신부와 함께 손을 나눠 각 도의 흩어진 교우촌을 찾아 밤낮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가며 전교에 힘쓴 결과 입국 당시 불과 4천 명이었던 신자수는 제 2대 교구장 범 주교가 입국한 1837년 말에는 갑절이 넘는 9천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39년 기해 대박해가 일어나고 서양인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점차 소문으로 퍼져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마침내 순교의 날이 닥쳐온다. 범 주교는 박해가 일어나 신변이 위험하게 되자 처음에는 자신만이 자수하고 두 신부(나 신부, 정 신부)에게는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고했으나 형편이 그렇게 못되었고 결국은 범 주교에 이어 두 신부도 자진하여 포졸에게 몸을 맡겨 관가에 자수하였다. 그는 1839년 9월, 홍주에서 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범 주교, 정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35세, 한국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13. (32.) 성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Imbert) 주교 (1796~1839) ☞ 머리카락

  한국명은 범세형(范世亨), 조선교구 제 2대 교구장. 주교로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같이 선교에 종사하던 나(모방), 정(샤스탕) 두 신부와 함께 1839년 기해박해 때 한강변 새남터에서 목을 잘려 순교하였다. 그는 조정에 의해 대박해가 일어나 더 이상 전교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은 물론 나중에는 두 동료 신부들에게까지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라는 말로 자헌을 권유하였다.
  범 라우렌시오 주교는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소(브뤼기에르)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교황청에 의해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로 성성되었으며 그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의 입국으로 조선교구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나, 정 두 신부와 더불어 교구 설정 6년만에, 그리고 교회 창설 53년만에 비로소 전교 체제를 갖추었으며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복음전파에 힘쓴 결과 신자수는 1839년 초 9천 명을 넘게 되었다. 그는 또 한국인 성직자의 양성에도 뜻을 두어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을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불어닥친 박해로 말미암아 성공하지 는 못하였다.
  범 주교는 1797년 4월 프랑스에서 태어나 1819년 12월 빠리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되었으며 다음해 3월 파리를 떠나 조선에 입국하기까지 중국 사천(四川)교구에서 10여 년간 사목활동에 종사하였다. 1839년 대 박해가 일어났을 때 지방을 돌아보고 있던 범 주교는 조정에 의해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 사실이 알려져 포졸들의 추적이 심해지고 교우들에 대한 박해가 가열되자 하는 수 없이 수원에서 가까운 바닷가 어느 교우집에 몸을 숨기었다. 여기서 그는 나, 정 양신부를 불러 두 사람에게는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하며 두 사람을 각기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그의 거처가 알려지게 되자 그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나아가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으며 나 신부와 정 신부에게도 인편으로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다같이 1839년 9월 21일 한강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는 43세,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 만이었다.

14. (34.) 성 정 야고보 샤스탕(Chastan) 신부 (1804~1839) ☞ 척추뼈

  한국명은 정 아각백(鄭牙各伯), 이 땅에 두 번째로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로 1839년 기해박해 때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정 (샤스탕) 신부는 1803년 10월, 프랑스 태생으로 1827년 1월 빠리외방전교회 신부가 되었으며 같은 해 4월 동양 포교지의 하나인 페낭 섬으로 떠났다. 그는 그곳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중 마침 소(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임지로 떠나게 되자 함께 동행하기를 자원, 1833년 5원 그곳을 떠났다. 그후 3년간을 중국 대륙과 몽고, 만주 등지를 전전하며 조선 입국의 기회를 기다렸으나 쉽게 뜻을 이를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소 주교는 입국도 못한 채 만주 땅에서 병을 얻어 목숨을 잃었으며 1836년 1월 조선 입국에 성공한 동료 나 신부로부터의 기별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마침내 1836년 12월 나 신부의 기별을 받고 의주 변문으로 간 정 신부는 마카오로 유학가는 김대건 등 세 소년 신학생을 전송하던 교우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무사히 국경을 넘어 이듬해인 1월 서울에 도착했다.
  정 신부는 서울에 도착하자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나 신부와 손을 나누어 각 지방에 산재해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집행했다. 정 신부 등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먹을 것도 여의치 않아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공복을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를 듣고 미사를 드린 다음날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안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고난을 감수해 가며 오직 복음전파에만 힘썼던 것이다. 정 신부는 한때 중병을 앓게 된 나 신부를 서울까지 올라와 간호해야 하는 어려운 일도 겪었으나 다행히 무사했으며 1837년 12월에는 제 2대 교구장 범 주교가 입국에 성공하여 전교활동은 차츰 본격화되어갔다.
  그러나 1839년 몰아닥친 기해 대 박해는 이 땅을 수많은 천주교인의 피로 물들였고, 정신부도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그해 9월 21일 새남터에서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정 신부의 나이는 35세요, 이 땅에 들어온 지 2년 9개월 남짓이었다.

15. (3.) 성 이호영 베드로 (1803~1838) ☞ 팔 뼈

  이 호영은 경기도 이천(利川) 출신으로 신유 박해 후 어머니와 과부가 된 누나 이 소사(아가타)와 함께 입교했다. 아버지가 대세를 받고 세상을 떠나자 서울로 이사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으며 이 때문에 유방제 (柳方濟) 신부(여항덕 파치피코 신부)로부터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l815년 2월 (음력 정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누나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나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고 참아내어 결국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때 결안(結案)의 사학죄인(邪學罪人)이라는 문구에 대해 천주교는 사학이 아니라 정도(正道)이며 거룩하고 참된 도(道)라 수결(手決)할 수가 없다고 버티자 포졸들이 강제로 수결시켰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연기되어 4년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누나 이 소사와 함께 한날 한시에 순교하자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다가 1838년 11월 25일 (음력 10월 8일) 긴 옥살이 끝에 얻은 병과 옥고로 옥사(獄死)했다. 그때 그의 나이 36세였다.

16. (93.)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 (1803~1866) ☞ 발 뼈

  일명 '낙소'로도 불리는 성 장주기 요셉은 경기도 수원 느지지 (현재,경기도 화성군 양감련 육당리)에서 출생했다. 1826년 영세 입교한 후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로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여 회장직을 맡아보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게 하는 한편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토지의 농사일과 잔일을 맡아 했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에서 신 뿌르띠에 신부와 박 쁘띠니꼴라 신부가 체포될 때 그는 제천 부근의 ‘노럴골’로 피신했으나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참아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의 ‘거더리’에서 압송되어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루가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17. (87.) 성 최형(崔炯) 베드로 (1814~1866) ☞ 발 뼈

  일명 '치장'으로도 불리는 성 최형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출생하여 14세 때 부모의 권유로 입교했는데 가족이 모두 독실한 신자였다. 1836년 마카오 유학길에 오른 3명의 신학생 중 병사한 최방제는 그의 동생이었다. 큰누나는 평생 동정으로 살았으며 형 최수는 병인박해로 절두산에서 참수되었다. 이러한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성장한 최형은 1836년 나 베드로 모방 신부의 복사로 교회 일에 헌신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로는 목수일과 묵주 만드는 일, 그리고 교회서적을 출판하는 일에 참여했다. 장 시므온 주교가 입국하자 교회서적 출판의 책임자가 되어 교회서적 출판에 큰 공로를 남겼다. 1866년 장 주교가 체포되면서 많은 교회서적이 적발되자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밀고로 전장운 요한과 함께 체포되어 3월 9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날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전장운과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18. (98.) 성 손선지 베드로 (1820~1866) ☞ 손 뼈

  일명 '승운'으로도 불리는 성 손선지 베드로는 충청도 임천의 ‘괴인돌’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어려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성격이 온순하고 착해 16세 때 정 야고보 샤스탕 신부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어 순교할 때까지 회장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손선지는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며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12월 5일 전라 감사의 체포령으로 대성동과 성지동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정문호, 한재권 등과 함께 전주 감영 후면옥에 갇히게 되었다. 신문 중 회장의 신분이 탄로나 공소를 거쳐간 서양 신부와 교회서적의 출처를 대라는 관장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손선지는 회장답게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며 함께 체포된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했다. 드디어 12월 13일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대성동과 성지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47세로 순교했다.

19. (89.) 성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1845~1866) ☞ 손 뼈

  일명 '세필'로도 불리는 성 우세영 알렉시오는 황해도 서흥 향교골에서 출생했다. 18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우연히 알게 된 김요한이라는 회장의 권유로 관직의 뜻을 버리고 상경하여 정의배 마르코에게 교리를 배운 후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그후 부모의 반대와 박해를 인내와 열정으로 참아내어 가족들을 입교시키고 신앙생활을 위해 평안도 논재로 이사했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2월 16일 이웃마을인 고둔리 공소에서 첨례를 보다가 유정률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평양 감영에서의 혹형에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석방되자 배교한 것을 후회하고 상경하여 스승 정의배를 만나러 갔다가 이미 체포된 정의배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 3월 11일 신 신부, 박 신부, 스승 정의배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했다.

20. (83.) 성 김 헨리코 도리 (Dorie) 신부 (1839~1866) ☞ 손 뼈

  한국성은 김, 1866년 병인 박해 때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선교사. 프랑스 ‘뤼송’ 교구 출신인 그는 1864년 5월 21일에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인1865년 5월 조선에 입국하여, 용인 손골에 배속되었다. 김 신부는 순교 때까지 운명을 같이 한 서 신부와 가깝게 지냈으며 천성이 온순하고 친절하여 한국말은 아직 서툴렀으나 교우들의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손골에서 지낸 8개월 간 교우들이 자기를 ‘김 신부’라고 부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기뻐하였는데 그것은 한국엔 ‘김’이라는 성을 가진 순교자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과연 김 신부는 자기의 소원대로 입국한지 10개월 만인 1866년 2월 손골에서 잡혀 3월 7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장 주교, 백, 서 신부에 뒤이어 네 번째로 참수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겨우 27세에 불과했다.

21. (71.) 성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1795 ~1841) ☞ 손 뼈

  경기도 광주 구산에서 부유한 외교인 가정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성우 안토니오는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입교차기 전부터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천주교를 알게 되자 즉시 두 동생과 함께 입교하여 열렬한 신앙으로 친척과 이웃에게 전교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그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도 중년에 이르러 입교하고 세상을 떠나자 김성우는 유방제(여항덕) 신부에게 직접 성세(세례)성사를 받고는 서울로 이사하여 사신의 집에 공소를 만들어 신부들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김성우는 천주교인으로 밀고 되었으나 미리 피신했었다. 고향 구산에 남아 있던 두 동생만이 체포되어 큰 동생 김덕심은 2년 후인 1841년 1월 28일 경기도 광주 옥에서 옥사했고, 작은 동생은 여러 해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러나 피신해 있던 김성우도 1840년 1월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김성우는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나 참아냈다. 옥을 자기 집처럼 생각하며 외교인 죄수들에게 전교하고 그중 2명을 신앙으로 인도했다. 이렇게 옥중에서도 열렬한 신앙으로 무수한 고초를 견뎌낸 김성우는 옥중 생활 15개월 만인 1841년 4월 28일 마지막으로 치도곤 60도를 맞고 그 다음 날 47세를 일기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22. (82.) 성 백 유스토 브르트니에르 (Bretenieres) 신부 (1838~1866) ☞ 발목뼈

  한국 성은 백(白),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선교사. 프랑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64년 사제가 된 백 신부는 서품되자 곧 동료 김, 민, 서 신부와 함께 고국을 떠나 이듬해인 1865년 5월, 조선에 입국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백 신부는 정의배 마르코 회장 집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워 박해가 시작될 무렵에는 교우들의 고백까지 듣게 되었다. 그는 정 회장이 잡힌 이튿날인 2월 26일 장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고발로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은 끝에 3월 7일 새남터에서 장주교와 함께 처형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28세, 이 땅에 온 지 채 1년도 못되는 이 젊은 사도는 땀보다는 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높이 현양하였다.

23. (94.) 성 황석두(黃錫斗) 루가 (1813~1866) ☞ 목 뼈

  일명 '재건'으로도 불리는 성 황석두 루가는 충청도 연풍에서 양반집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성장하여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보러 상경하던 중,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했다. 그후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이나 벙어리 행세를 해가면서 교리서적을 탐독하였고 그 결과 박대하던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였다. 이같이 뛰어난 덕행과 교리지식으로 그는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또 회장으로 활동했다. 또 고 페레올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 받고 독신생활을 하였다.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를 도와 교리서를 번역하여 교회서적 출판에도 참여했다. 1866년 3월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안 주교를 몇 십리나 따라가 결국 체포되어 주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3월 23일 사형을 선고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장주기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을 받고 54세로 순교했다.

24. (100.) 성 한재권(일명 원서) 요셉 (1836~1866) ☞ 하지골

  성 한재권 요셉은 태중 교우로 충청도 ‘진잠’에서 태어나 부모의 착한 모범을 따라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 또 진잠 지방의 회장으로 활동했다. 박해로 전주 대성동으로 이사한 후에는 아무 직책없이 교회 일에 충실했다. 1866년 12월 5일 한재권은 전라 감사의 명으로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손선지, 정문호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친구를 통해 석방 교섭을 벌이는 한편 옥에까지 찾아와 배교 할 것을 간청했으나 한재권은 "아버님, 그 말씀은 따를 수가 없습니다"하고 아버지의 간청을 거절하고,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31세로 순교했다.

25. (99.) 성 이명서 베드로 (1821~1866) ☞ 두개골

  일명 '재덕'으로도 불리는 성 이명서 베드로는 충청도 출신으로 박해를 피해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몇 해 전부터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성지동에 정착했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가 지방으로 퍼지고 전라도 지방에서도 전라 감사의 지시로 전주 부근의 교우촌인 성지동과 대성동이 제일 먼저 피해를 입게 되었다. 12월 5일 포졸들이 성지동을 습격할 때 이명서는 조화서의 피신 권유를 뿌리치고 병든 몸으로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전주 감영에서는 병자인 이명서를 배교시키기 쉬울 것으로 생각하고 제일 먼저 신문하고 혹형과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했으나 이명서는 "내가 몇 번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나의 하느님을 버릴 수는 없읍니다"하고 배교를 거부하고 함께 체포된 교우들과 부지런히 기도하며 순교를 준비했다. 드디어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아 4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26. (96.)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1801~1866) ☞ 하지골

  일명 '계식'으로도 불리는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는 충청도 임천 출신으로 임천에서 천주교를 알아 입교하여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박해로 인해 고향을 버리고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 때에는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고 있었다. 한때 고을의 원을 지내기도 하여 품행이 단정하고 성격이 강직해서 교우들뿐 아니라 외교인들에게까지 평판이 좋았다. 1866년 12월 초 사람을 시켜 박해에 대한 전주 감영의 동태를 살피러 보냈으나 그 소식을 듣기도 전에 12원 5일 대성동과 성지동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손선지, 한재권 등과 체포되어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66세로 순교했다. 순교하기 전 그는 옥중에서 항상 기도로써 순교를 준비했고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오늘 우리는 천국으로 과거보러 가는 날이다. 오늘은 정말 기뻐해야 할 날이다"고 하며 진심으로 자신의 순교를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