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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순교자 8위

1. 이정식 요한(1794~1868년)

  이정식(李廷植) 요한은 경상도 동래 북문 밖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무과에 급제한 뒤 동래의 장교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활 쏘는 법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나이 60세 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한 뒤로는 첩을 내보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요한은 이후 가족들을 열심히 권면하여 입교시켰으며, 누구보다 수계에 열심이었다. 화려한 의복을 피하고, 항상 검소한 음식을 먹었으며, 애긍에 힘쓰면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 작은 방을 만들어 십자고상과 상본을 걸고 묵상과 교리 공부에 열중하였다.
  이러한 열심 때문에 요한은 입교한 지 얼마 안되어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언제나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들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울산 수박골로 피신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868년 이정식 요한 회장은 동래 교우들의 문초 과정에서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동래 포졸들은 그가 사는 곳을 수소문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그의 거주지를 찾아내 그곳에 있던 교우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그때 요한의 아들 이월주(프란치스코)과 조카 이관복(베드로)은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스스로 포졸들 앞으로 나와 자수하였다.
  이내 동래로 압송된 요한 회장은 그곳에서 대자 양재현(마르티노)을 만나 서로 위로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자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문초를 받게 되자, 요한은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하고는 많은 교우들을 가르쳤다는 것도 시인하였다. 그러나 교우들이 사는 곳만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또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였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요한과 동료들은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47일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고통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신앙을 버리고 석방된 사람은 없었다.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결정하였다. 그런 다음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로 압송하였다. 이때 사형을 맡은 군사들이 부자를 한날에 죽이는 것을 꺼려하자, 동래 관장은 동시에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요한은 참수형을 당하기에 앞서 삼종 기도를 바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으니, 그때가 1868년 여름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복자품에 오르게 되었다.

2. 양재현 마르티노(1827~1868년)

  1827년에 태어난 양재현(梁在鉉) 마르티노는) 언제부터인가 경상도 동래의 북문 밖에서 살았다. 그는 동래에서 좌수(坐首)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정식(요한) 회장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후 그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68년의 박해 때 마르티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알려져 동래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포졸들이 집으로 들이닥치자 태연하게 그들을 맞이한 뒤 관아로 끌려갔다.
  이윽고 관장 앞으로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마르티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는 형벌을 달게 받았다. 또 관장이 배교를 강요하자, “절대로 천주교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다시 문초를 받고 수군의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양재현 마르티노는 수군의 병영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배교를 거부함으로써 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옥에 들어가서는 옥졸의 꾀임에 빠져 ‘돈을 주겠다’고 약속한 뒤 몰래 그곳을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옥졸은 마르티노가 집으로 돌아가자 관장에게 가서 ‘죄수가 몰래 도망쳤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이내 포졸들이 다시 마르티노의 집으로 몰려왔고, 그는 즉 체포되어 동래 관아로 압송되었다. 마르티노의 신앙심은 이때부터 다시 굳건해지게 되었다. 그는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천지의 큰 부모이신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후 마르티노는 통영에 있는 수군의 병영으로 이송되어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동래 관아로 끌려와 옥중에서 이정식 회장과 동료 교우들을 만나게 되었으며, 서로를 위로하면서 신앙을 굳게 지키기로 약속하였다.2)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결정하였다. 그런 다음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로 압송하였다. 이때 마르티노는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으니, 그때가 1868년 여름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3) 순교 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복자품에 오르게 되었다.

3. 이월주(李月株) 프란치스코(1827~1868)

  이월주 프란치스코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전혀 잘못 이해되어 왔다. 예를 들면 <치명일기>에서는 이정식의 아들 이 프란치스코를 이관복(李寬福)으로 잘못 보았다(<치명일기>에는 성과 세례명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정식 가문의 호준구(準戶口: 조선 시대, 호적 대장에 따라 작성하여 각 개인에게 발급한 일종의 호적 등본을 이르던 말)에는 이정식의 아들로서 분명히 등재되어 있어, 지금까지의 혼란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이 준호구는 1846년(헌종 12) 3월에 발급한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그의 처를 박씨로 기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치명일기>의 기록도 주목된다. 비록 이름을 잘못 알고 있었지만 <치명일기>의 819번 항목의 이 프란치스꼬에는 “요한의 아들이라. 그 부친과 한 가지로 잡혀 치명하니라.” 라고 설명되어 있다.

4. 박소사(朴召史) 마리아(1822~1868)

  박소사(소사: 과부를 점잖게 이르던 말이며 이 단어를 이두어로 표현하면 조이가 됨) 마리아는 이월주 프란치스코의 아내였다. <치명일기>(1895년) 820번 박마리아 조항에서는 “이 프란치스꼬의 아내니, 장부와 한가지로 잡혀 치명하니라.”라고 되어 있다. 또한 일성록에서는 박조이로 나오며 치명당할 때의 당시 나이는 46세였다.

5. 이관복(李寬福) 베드로

  이관복 베드로는 <치명일기> 821번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요한(정식)의 조카이니, 요한과 한가지로 잡혀 치명하니라.”라고 하여 이정식의 조카로 지칭하고 있다. 그리고 준호구에 나오는 이평원(李平煊)이 이관복과 동일 인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병인군난치명사적>(1924년)에서는 이관복 베드로가 이정식 요한의 동생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라 보기 어렵다.

6. 이삼근(李三根) 야고보

  이삼근 야고보에 대한 사료는 먼저 <일성록>(1868년 음8.4)에서는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단순히 李三根의 이름만 나오고 있으며, <치명일기>에서는 ‘본래 서울 사람이라. 이요한과 한가지로 (수박골에서)은신하다가 요한과 한가지고 잡혀 치명하니라.’라고 나타나고 있다. 한편 <병인군난치명사적>에서는 이선달의 동생이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교회와 역사』 27호에서는 이 내용을 인용하여 이정식의 동생으로 보고 있으나 이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삼근 야고보는 서울에 거주하는 선달로 보는 것이 근거가 있다.

7. 차장득(車長得) 프란치스코

  차장득 프란치스코에 대한 사료는 단지<일성록>에 그 이름이 나오고 있을 뿐이며 그는 울산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8. 옥소사(玉召史) 바르바라

옥소사 바르바라에 대한 사료도 단지 <일성록>에 그 이름이 나오고 있을 뿐이며, 1868년 8월4일(양력 9월20일) 수영장대에서 7명의 동료들과 함께 치명 당한 순교자로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