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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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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 대원군의 병인박해인 1868년, 당시 통영에는 우수영(해군사령부), 그리고 동래에는 경상좌수영이 있었다.조선왕조시대 군영에는 지휘관이 군사들의 열병과 훈련을 하던 연병장과 그 정면에 간혹 중죄인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던 돌로 쌓은 높은 장대(將臺)가 있었다.※ 장대(將臺)[명사] : 지휘하는 장수가 올라서서 명령하던, 돌로 높이 쌓은 대(臺). 성(城)·보(堡)·둔(屯)·수(戍) 따위의 동서(東西)에 쌓았음. 현재 장대골 순교성지는 황령산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광안리, 민락, 수영 앞 바다와 수영강 하구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군사 요충지로 지금의 수영에 자리잡고 있었던 조선시대 경상 좌수영으로부터 두어 마장(馬場)떨어진 언덕에 일본의 침입을 감시하고 군사를 호령하던 장대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조선시대 정조이후 임금들의 조정일기인 '일성록(日省錄)'에 의하면 대원군의 병인박해가 시작된지 2년 뒤인 1868년 9월 19일(음력 8월 4일) 이곳 장대골에서 당시 경상 좌수사 구주원(具胄元)이 천주교의 동래지역 선교회장인 이정식(요한) 등 모두 8명을 처형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순교자들의 명단은 1. 이요한(이정식) 2. 이 베드로(이삼근: 이정식의 조카) 3. 이 프란치코(이월주: 이정식의 아들) 4. 박 마리아(박소사) 5. 양 마르티노(양재현) 6. 차 프란치스코(차창득) 7. 이 야고보(이관복) 8. 옥 바르바라(옥소사) 이다. 원래 11명이 체포되었으나 혹형에 못이겨 그 중 셋은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이들 중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는 최근 한국에서 추진하는 제2차 시복시성운동인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에 포함되어 시복과 시성대상이 되어있다. 따라서 이 두 분의 순교 사기(殉敎 史記)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이정식은 동래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달직에 있으면서 동래 병영의 장교로도 있었고, 또한 무술이 비범하여 많은 제자들에게 무술을 가르쳤다. 그는 입교하자 벼슬을 사임하고 오로지 선교에 전념하여 회장직에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가족을 데리고 기장(機張)으로 피신하여(경주로 옮겼다가) 1868년 봄까지 살다가 울산(수박골)으로 옮겼다.
이 때 울산 피난처에서 그 가족 3명과 다른 교인들이 함께 잡혀 즉시 동래부사 앞으로 압송되었다. 그때는 선참후계(先斬後啓)하라는 나라의 명에 따라 부사(府使)는 그들을 대강 취조하고 형벌을 가하였다. 마침내 47일 동안 옥중생활을 한 끝에 수사(수군절도사) 구주원에게 넘겨 군법에 의하여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무수한 혹형을 받고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한결같이 그들은 <우리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속히 죽여주십시오. 우리는 천주를 위하여 죽기로 결심하였소> 하고 용맹하게 대답하면서 목에 칼을 받았으니 그 때가 1868년 8월 19일이요, 장소는 수영 장대(현 부산 광안동 수영중학교 뒤)이며 이정식의 나이는 80세쯤(75세였다) 되었다.

  양재현은 동래 북문 밖 신내동(新內洞)에 살던 좌수(座首=鄕長)였다. 그는 1813년에 출생하였고 입교한 때는 알 수 없으나 이정식 회장을 대부로 정한 것을 보아 회장의 권유로 입교한 듯하다. 그 당시 좌수라 하면 여간한 벼슬보다 민간에서는 더욱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가 잡힌 때로부터 순교하던 사실과 매장할 때 직접 관계했던 그의 부인 최 마리아, 아들 벨라도(당시 16세), 며느리 엘리사벳(당시 19세), 이정식의 며느리 이 아네스(둘째 아들로 충주에서 순교한 다두의 부인인 듯, 후에 하와이로 이주함)의 증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1868년 2월 16일(음력) 저녁이었다. 전국에서 박해가 다시 심하여져 민심이 소란하던 때였다. 동래, 울산, 기장 등지에서도 교인들을 잡아들인다는 소문에 양재현 집에서도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던 참이었다. 느닷없이 포졸 2명이 좌수를 찾았다. 마침 좌수는 올 것이 왔다는 각오로 문을 열고 그 누구인가 하고 물었다. 포졸들은 좌수의 안전이라 공손히 “사또께서 좌수님을 잡아오라 하시기에 우리가 왔사오니 빨리 나오셔야 하겠습니다.” 한다. 좌수는 도포와 의관을 갖추어 손에 기도서를 가지고 나와 포졸들에게 태연히 갈 길을 재촉하였다. 포졸들은 그들의 버릇대로 차사례(差使禮: 고을원이 죄일을 잡으려고 보내는 하인에게 건네는 교섭비)를 달라고 졸랐다. 좌수는 쾌히 승낙하고 돈 15냥을 주고 부사아문으로 갔다.
  포졸들이 “사또 나으리, 죄인 대령하였나이다.”하고 아뢰니, 부사는 즉시 좌정하고 좌수에게 “너는 어떻게 흉악한 천주학을 한단 말인가?” 하고 호령했다. 좌수는 태연히 대답하기를 “예 천주님을 믿사옵니다.” 하니까 부사는 더 묻지도 않고 즉시 나졸들에게 명하여 “형틀을 차리고 이놈에게 태장 열대를 쳐라”하였다. 나졸들은 좌수를 형틀에 동여매고 10도의 태장을 마구 쳤다. 부사는 “이 놈 아직도 그 도를 버리지 못할까?” “예 못버립니다.”하고 대답하니 관장은 “이 놈을 칼을 씌워 하옥하라”하였다
  좌수는 20일 동안 옥에 갇혀다가 다시 관장 앞으로 불려나와 또 다시 배교하라는 위협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관장은 할 수 없이 죄인은 수영(水營)으로 압송하라고 명령하였다. 수영에 압송된 후에 수사 구주원은 심문도 하지 않고 즉시 죄인을 하옥하라 하더니 그 이튿날 아침에야 심문을 시작하였다. “여봐라 너는 나라에서 금하는 천주학을 한다니 그것이 참말이냐?” “예 과연 그러하외다” “다른 사람은 다 아니하는 그 흉악한 타국의 도를 너는 어째서 한단 말이냐? 이제라도 버려라” “그리 못합니다. 만만코 버리지 못합니다” “이 놈 너는 소위 고을 좌수라 하면서 그런 흉측한 도에 물들었단 말이냐? 끝내 고집하면 내일 큰 형벌을 당할 줄 알라. 그래 대답해 보아라”하며 몇 번이고 다그쳐 협박하였지만 좌수는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으므로 “여봐라, 저놈을 태장 20도를 쳐라”하였다. 그리고 하옥시켰다.
  투옥된 지 며칠 후 옥사장이 좌수에게 밥을 주면서 돈 3백냥만 주면 밤에 옥문을 열어 내보내주겠다고 하였다. 좌수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밤에 옥문을 나와 귀가하였다. 옥사장은 관장에게 허위보고 하기를 간밤에 죄수가 도망쳤다 하였다. 부사는 나졸을 풀어 탈옥수를 잡으라고 명하였다. 병주고 약주는 나졸들은 돈에 눈이 어두워 벌떼같이 좌수의 집을 포위하고 찾았으나 이미 좌수는 다른 집으로 피신한 터라 허탕을 쳤다. 그러나 나졸들은 애꿎은 부인에게 “그러면 당신이라도 대신 갑시다”하고 추상같이 얼러대었다. 좌수 부인은 “여자가 관청에 간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또 무슨 말을 하겠소?”하고 버티었다. 나졸들은 개버릇 못버려 저희끼리 수군거리더니 “그러면 차사례나 톡톡히 내시면 부인은 잡아가지 않으리다.”하고 돈을 요구하였다. 부인이 돈 40냥을 주니 나졸들은 그만 돌아갔다. 나졸들은 관장에게 좌수는 어디로 도망했는지 도무지 잡을 수 없다고 보고했더니 관장은 화가 나서 나졸들을 형벌에 처하고 대신 다른 나졸 7명을 좌수의 집으로 보내어 잡아오게 하였다.
  좌수는 부인의 말을 듣고 무사한 줄 알고 본집으로 와 있던 터이었는데, 나졸들이 들이닥치니 다시 체포될 수밖에 없었다.

  좌수는 부인 마리아에게 “여보 임자도 나와 함께 갑시다.”한즉 부인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다음 아들 벨라도와 며느리 엘리사벳을 보고 “너희도 나를 따라 함께 가자. 천주께서 부르시니 영복을 받으러 가자”하였으나 그들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좌수는 부인과 아이들에게 “임자와 아이들이 나와 함께 가기 싫어하니 그만 두어라. 내가 이 길을 떠나면 언젠가 우리는 천국에서 만날 것이다. 부디 주님 뜻대로 살아가도록 열심히 기도하여라”하고 당부하며 도포와 의관을 갖춘 다음 기도서 한권을 가지고 나졸들을 재촉하여 집을 떠났다. 관청에 대령한 좌수를 보고 부사는 “이 놈 네가 수영 옥사장과 의논하고 돈 3백냥을 주고 도망했다지, 그대 본국의 도는 마다하고 타국의 도를 아직 버리지 못하겠느냐? 배교하면 나라에서 상금도 주겠고 도망간 죄도 다 용서하겠다.” “못합니다. 못버립니다.”하고 좌수가 대답하니, 관장은 성이 나서 형졸들에게 곤장 10도를 쳐서 하옥시켜라 하였다.
  5일 후에 다시 심문하기를 “그동안 많이 생각해 보았느냐? 이제는 개과하겠느냐?” 하자 “못합니다. 천지 대부모이신 천주를 어찌 배반하겠습니까?” “그러면 이젠 통영으로 이송시키겠다. 그리로 가서 너야 죽던지 살던지 네 마음대로 하라” “사또 나으리, 저는 몸이 아파 걸어서는 통영까지 못가겠습니다. 장독으로 인해 굴신을 못하는데 어떻게 그 먼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럼 조군을 내어줄 터이니 들것을 타고 가라”하였다.

  이리하여 통영 우수영에 이송된 좌수를 영장이 심문하기를 “이 좋은 세상에서 무엇을 바라고 하필 그 흉한 도를 믿는단 말이냐? 배교하면 방면하겠다.”하니 좌수는 단호하게 “죽어도 배교하지 못합니다.” 했더니 영장은 “아직 네가 형벌을 덜 받아 그따위 소리를 내 앞에서 하는 모양이다”하고 즉시 형졸들에게 청동화로 불을 피워 인두를 달구어 형틀에 결박된 좌수의 온 몸을 지졌다. “그래도 항복 못할까?” “못합니다. 죽어도 못합니다.”하고 대답했다. 형졸들이 불에 달군 인두로 좌수의 등으로부터 수족을 지졌을 때 푸른 김이 풍기고 살이 익어 검푸르게 탔다. 천지가 아득하며 정신이 혼몽해져 좌수는 그만 죽은 듯 땅에 쓰러졌다. 한참 있다가 영장이 “이 놈 이래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릴까? 한마다로 배교만 해라. 살려주마” 하였다. 좌수는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서도 그 말에는 고개만을 저을 뿐이었다.

  영장이 이젠 더 어찌할 방도가 없어 단념하고 하옥시켰다. 투옥된 좌수는 그 해 7월 1일에 다시 동래부사 아문으로 반송되어 부사 앞에 대령되어 “이제는 네가 개과했느냐?” 하고 부사가 부드러운 말씨로 물었다. “개과라니요, 이 세상 영화를 준다 해도 고맙지 않으며, 오직 천주만을 원할 뿐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부사는 어떤 감언이설로도 굴하지 않는 좌수를 하옥시켰다. 좌수가 옥에 들었더니 천만 뜻밖에 여기서 대부인 이정식 회장과 그의 동생, 아들 그리고 여러 교우들을 만나게 되었다. 너무 반가워 좌수는 “아이고 대부님 이게 웬일입니까! 천주의 은총과 섭리는 무궁도 합니다”하고 얼싸 안았다. 이정식도 뜻밖의 일이라 “마르티노를 여기서 만나니 다 천주의 안배인가 하오, 우리가 주님께 간구하여 모두 함께 영복소로 들어갑시다” 하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했다.

  옆 옥에서는 이정식의 자부 박마리아가 있어 모두 10명의 교우가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이 옥중생활을 하던 중 불행히 세 사람은 고통을 견디다 못해 그만 배교하여 방면되고 다른 8명은 8월 18일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들은 사형선고문에 수장을 찍고 형장으로 나아갈 때 ‘영화롭도다, 이 길이 영화롭도다.’ 하고 춤추듯이 기뻐하였다.
  8월 19일 오전 9시쯤에 남녀교우 8명이 사형장인 수영장대로 호송되었다. 부사 정현덕(鄭顯德)이 장대에 높이 좌정하고, 영장의 지휘에 따라 수십 명 군인이 좌우에 나열하였다. 부사는 교우들을 한 줄로 앉게 한 다음 큰 소리로 “너희들 내 말을 잘 들어라. 나라에서 오늘 너희를 죽이라는 명령이 내렸으니, 사실 애석하고도 기탄할 일이로다.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살고 싶은 사람은 단 한마디라도 좋으니 배반만 하여라.” 하고 가장 동정이 넘치는 듯한 말로 타일렀다. 8명의 용사들은 마치 의논이라도 한 듯이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듯 함께 “가세, 가세, 천당으로 가세” 하였다. 관장도 “나도 너희를 될 수 있으면 살려주려 했지만 이젠 다 허사로다”하고 형졸들에게 명하여 마지막 사별상을 차려주라 하였다. 용사들 앞엔 한 두루미 술과 몇 가지 안주가 놓인 사별상이 놓였다. 모두 성호경을 외우고 이정식만 술 한 잔을 마시고 나서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길을 묵상하면서 성모를 따라가자,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하고 소리를 질렀다. 술에 취한 휘광이들은 시퍼런 칼로 내어민 이정식의 목을 먼저 치고 다음 양재현과 나머지 교우들의 목을 차례로 잘랐다.
  이렇게 8명의 용사는 영광스럽게 순교하였다. 구경꾼 틈에 끼인 그들의 가족들은 순교하는 광경을 자세히 살피다가 구경꾼들이 다 헤어지고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제각기 순교자들의 머리를 찾아 몸에 붙여 등불을 밝히고 대강 염습하여 형장에서 가져 나와 장례하였다.

  이상 수영 장대골에서 순교한 두 분의 내용은 일성록 1868년 8월 4일자에 기록되어 있으며, 교회문헌으로는 『치명일기』정리번호 817; 『병인치명사적』3권, 1923. 6. 6; 18권 p. 40, 김 안토니오 회장의 증언 등에서 나오고 있다.

  이상 순교자 8명 중 이정식의 가족 4명의 무덤이 원래 부산시 동래구 명장동 산 96번지에 있었던 것을 1977년 9월 19일 많은 성직자, 의사를 포함한 여러 교우들이 조사하고 지켜보는 가운데 부산 동래구 부곡동 산 15-1 한국 순교자 기념관 뒷동산으로 이장했다. 그러나 나머지 4명의 무덤은 아직 찾지 못하여 다만 기념비와 가묘만을 두고 있다.